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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이동희, 「한지의 본가 전주」,『전주학총서 31 꽃심을 지닌 땅, 전주-Ⅰ역사문화편』, 전주역사박물관, 2015, 294-304쪽.

- 이동희, 「전주한지의 역사성」, 『전주학총서 21 왜!전주가 가장 한국적인 도시인가』, 전주역사박물관·전북대 한스타일연구센터, 2011, 77-94쪽.

고려시대의 전주한지
  • 우리나라의 제지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이 최고의 종이로 선호하는 고려지는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닥나무 재배를 국가적으로 권장하는 등 한지 생산을 국가산업으로 발전시켜갔다. 후백제 견훤이 고려 왕건에게 부채를 선물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견훤은 918년 고려 왕으로 즉위한 왕건에게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사하였다. 견훤이 왕건에게 부채를 선물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이곳에서 생산된 부채가 특산품이었으며, 부채를 만드는 종이의 질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일이지만 부채는 국왕에게 올린 전주의 진상품이었고, 전라도에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가장 많았다.
  • 『고려사』「정가신 열전」에 보면, 고려 충렬왕 6년(1280) 정가신이 임금과 종이에 대해 논하면서 자신이 전주 지방관으로 있어봐서 종이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고 말하고 있다. 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전주가 한지의 주요 산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 또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전주 사람 이백유의 효성을 높이 산 시에서 “완산엔 종이가 있어 넓고 또한 길거니, 내 그 종이 다 쓰련다 어찌 그만둘 쏜가(完山有紙闊且長 我欲盡涅烏可已).”라고 하여 서화지로서 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예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전주한지
  • 조선 초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외공장(外工匠)’이라고 하여 지방의 장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8도 전체의 외공장 수가 총 27개 종목에 3,656명이다. 이 중 종이를 뜨는 장인 지장(紙匠)들이 가장 많아 692명으로 전체 외공장의 18.9%에 이른다. 외공장 중에서 지장들이 가장 많다는 것은 제지업이 조선 수공업의 대표적인 산업이며, 종이가 일상생활에 그만큼 널리 쓰였음을 말해준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이들 지장을 군현별로 나누어보면 전주와 남원이 각각 23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경상도는 가장 많은 지장을 둔 곳이 밀양으로 17명이다. 충청도는 가장 많은 지장을 배치한 곳이 청주, 공주, 홍주로 각각 6명이다. 강원도는 2명, 황해도는 4명이 지장이 가장 많은 군현이다. 전주와 남원의 지장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조선 초 이 두 지역이 한지 생산을 대표하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 초 전주는 남원과 함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쓰이는 당대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 전라도는 한지가 특산품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전주와 남원의 종이가 최고였음은『세종실록』의 다음 기사에도 나타나 있다.

    윤수가 아뢰기를“, 처음 조지소의 신설을 당하여 모두 이르기를‘, 종이의 품질이 반드시 남원이나 전주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하였는데 지금 조지소의 종이 품질이 대단히 좋아서 도리어 남원·전주의 종이를 쓰지 않고 있사오니, 한 관사를 신설하여 오로지 직조만을 다스리게 한다면 또한 반드시 좋게 될 것입니다.(『세종실록』권49, 12년 9월 기유)

  • 중종대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전주한지를 상품(上品)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전주한지는 이후 조선 말까지 변함없이 특산물로 자리하였다.

    즉 15세기의『세종실록지리지』(1454년(단종 2), 편찬), 16세기의『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중종25, 편찬), 18세기 말에 간행된『호남읍지』, 19세기 후반의『호남읍지』에 한결같이 전주의 특산물로 한지가 등재되어 있다.

  • 18세기 후반 정조 때 서명응(徐命膺)이 펴낸 『고사신서(攷事新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송나라 사람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말함에 반드시 고려지를 최상의 것으로 하였다. 이는 당시 조공품으로 바쳤던 종이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조지서(造紙署)의 자문지(咨文紙), 평강(平康)의 설화지(雪花紙), 전주와 남원의 선자지(扇子紙)·간장지(簡壯紙)·주유지(注油紙)·죽청지(竹淸紙)등이 가장 뛰어나다(徐命膺,『攷事新書』12集卷10 紙品高下條).

  • 19세기 전반 서유구(徐有榘)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조지서의 자문지, 강원도 평강의 설화지, 전주와 남원의 선자지·간장지·주유지·유둔지 등이 조선의 특산 종이이며, 이외에 태지·죽청지도 빼어난 명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 19세기 말 이유원(李裕元)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종이는 우리나라가 해 내에서 으뜸이며, 그중에서도 호남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국의 저산은 해내가 으뜸이고 그중 호남이 제일이다. 완산은 그 품질이 다음어지지 않으나 부드럽고, 순창은 정화하나 약하고, 남평은 단단하나 어둡고, 남원은 백설과 같고 부드러움이 기름덩어리와 같다. 천하제일의 기품으로 그 이유는 수질 때문이다. 영남은 거칠고 무거우며 빛깔이 고르지 않다.(『林下筆記』12, 楮山條).

  • 구한말 제정 러시아가 조선의 제반 문물을 조사 정리한 정책자료집 『한국지』(1900)에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조선에서 종이를 다방면에 걸쳐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고, 조선의 제지술이 종이를 발명한 중국보다 앞섰다고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조선종이의 절대다수가 전라도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하였다.

    동방의 국민, 특히 중국, 일본과 한국의 가정생활에서 종이는 서구나 신세계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 특히 한국의 경우에 언급하자면, 이 나라에서는 종이와 종이로 만든 제품은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더욱 널리 사용되고 있다.
    … 한국에서 종이가 다방면에 걸쳐 사용되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이로써 화투장 부채 병풍 벽지 외등 깔개 등을 만들 뿐만 아니라 우산 양산 비를 가리는 모자와 비옷 병복(兵服) 등심(燈心) 노끈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이 종이로써 한국의 부녀자들은 치마 옷을 지으며 방수포(防水布)를 만들기도 한다.
    …대단히 두터운 종이는 러시아의 판지(板紙)보다도 현저하게 질기며 이것으로 여행 가방을 만든다. … 종이를 여러 겹으로 접기만 하면 모포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사람을 집어 던져도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한국의 제지업은 많지 않은 발달된 제조업 중 하나로 한국 사람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만은 아직까지 그들의 이웃 나라인 중국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아니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인들을 어느 정도 능가하고 있다.
    …제지업은 일반적으로 북부를 제외한 반도의 모든 지역에 보급되어있다.
    그러나 가장 양질의 종이와 종이의 절대다수는 전라도에서 제조되고 있다.
    (『국역한국지(國譯韓國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러시아인들이 보았듯이,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전라도는 한지의 본산이었으며 그 중심지가 전주였다. 전주한지는 그런 역사성과 전통성을 갖는 최고의 종이였다.

  • 조선 멸망 후 일제강점기에도 전주는 제지업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1944년에 간행된 『조선지(朝鮮紙)』에 한지업에 종사하는 호수들이 조사되어 있는데, 먼저 도별로 보면 전라북도가 1,772호로 가장 많다. 전라북도 1,772호를 군별로 나누어보면 완주가 가장 많아 475호가 한지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완주는 1935년 전주에서 분리된 전주의 외곽으로, 실질적으로 한지가 많이 생산되었던 곳이다. 완주군에 이어 두 번째가 고창 311호, 세 번째가 진안 303호, 네 번째가 임실군 290호, 다섯 번째가 남원 143호, 여섯 번째가 순창 107호, 일곱 번째가 무주 91호이다. 전주는 이처럼 일제강점기 말에도 한지 생산을 대표하는 곳이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다.
전주고지도에 등재된
조선시대 지소
  • 전주에는 병풍형의 대형 고지도 「4폭병풍 전주부지도」(전북대박물관)와 「완산십곡병풍도」(국립전주박물관) 2점이 전해온다. 이들 고지도는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전주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전주성 안팎에 종이를 뜨던 지소(紙所)가 표기되어 있다. 전주부성 안에 보면 전라감영 내에 지소가 있다. 감영 서북편으로 책을 찍는 인출방 양옆에 내지소 건물이 있다. 지소 밑으로 내려오면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매우 큰 규모로 있다. 지소 건물에는 ‘지소’라고 표기된 건물과 ‘지침(紙砧)’이라고 표기된 건물이 있다. 지침은 고해(叩解)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생각된다. 고해는 닥나무 백피를 닥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겨 닥섬유를 잘게 부수는 것을 말한다. 지소 위에는 ‘도침방(搗砧房)’이라고 표기된 건물이 있는데, 도침은 디딜방아를 찧어 종이를 단단하고 평평하게 다듬는 것이다.
  • 전주천 밖 도토리골에는 외지소가 설치되어 있다. 사직단 북쪽 도토리골 천변가로 황학대(黃鶴臺) 아래 산으로 둘러싸인 채 앞면이 열려 전주천에 접하고 있고, 그 안에 외지소 건물 기와집 3채가 그려져 있다. 마을 앞에는 전주천을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가 있다. 외지소가 있던 도토리골은 구 진북교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북쪽으로 유연대 어은골이 이웃해 있다. 전주에서 임실로 넘어가는 상관에도 외지소가 설치되어 있다. 슬치 만마관에 가기 전에 신원역이 있고, 이 역에 못 미쳐 좌편으로 지소가 위치해 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사찰에서 많은 종이를 생산하였다. 전주의 경우도 남고산성 지도에 남고사와 함께 지소가 표기되어 있다. 전주부고지도에 송광사 지소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소양면 송광사는 전주한지의 기원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송광사의 하급 스님들이 직접 종이를 뜨고 동리 사람들에게도 이를 가르쳐 관수용을 납품했다.”고 한다. 절에서 불경간행 등의 이유로 종이를 떴으며, 특히 조선 후기에는 관영에서 민영으로 넘어가면서 사찰이 종이 생산의 거점이 되었다. 지장들의 구술에 의하면 송광사를 중심으로 소양면은 마수교 부근을 비롯해 냇가를 따라 그 안쪽으로 한지공장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지금도 슬라브 벽돌로 된 한지공장 건물들이 여러 곳 남아 있다. 소양면에서는 주로 장판지를 생산했다. 서울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장판지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소양면은 장판지 생산지로 또 한 번의 절정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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